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by 펠리치타스08 2025. 4. 22.
반응형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2013년부터 전 세계 14억 가톨릭 신자를 이끌었던 제266대 교황이 2025년 4월 21일(현지시간) 88세를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교황청 궁무처장 케빈 페렐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아침 7시 35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는 호흡기 질환으로 오랜 치료를 받아왔고, 양쪽 폐에 폐렴 진단을 받은 후 고용량 산소 치료와 수혈 등을 받아왔습니다.

3월 23일 병원에서 퇴원하며 활동을 재개했으나, 부활절 미사 직후 갑작스럽게 선종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 "가난한 이들 편에 서라"는 유언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간소한 장례"를 원했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조용히 안장될 예정입니다. 그의 유언은 "대성당이 아니라 지하에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 청빈과 개혁의 아이콘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신발 공장에서 일하며 공업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청년 시절부터 빈민촌 사목에 앞장서며, 평생을 ‘서민의 교황’으로 살아왔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철제 십자가, 허름한 구두, 소형차 등 겸손한 행보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으며, 교황 전용 관저가 아닌 일반 숙소에서 지내며 검소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선종 소식 자세히 알아보기

📌 진보적 개혁과 평화의 메시지

그는 가톨릭 내 보수적 전통에 도전하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 허용, 평신도 참여 확대 등 다양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또한 미국-쿠바 국교정상화, 로힝야 사태,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사태 등에서 평화의 목소리를 냈으며, 기후 위기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등 세계사적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2014년 아시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평화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방북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에는 참석이 어려워지며, 다음 교황의 몫으로 남게 됐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포용과 겸손, 개혁과 평화’의 상징이었던 한 인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생

프란치스코 교황,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의 5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1. 가난한 소년, 평범한 노동자

그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일하던 양말 공장에서 청소와 사무보조를 도우며 생계를 보탰고, 공업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하며 오전엔 일하고 오후엔 공부하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경험한 노동의 고통과 서민의 삶은 훗날 교황으로서의 철학과 실천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2. 예수회 사제가 되기까지

21세의 나이에 심각한 폐 감염으로 폐의 일부를 절제하는 큰 수술을 받았고,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 사제의 길을 결심합니다. 1969년 사제로 서품된 그는 예수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빈민 사목에 집중했고, 1992년 주교, 2001년에는 추기경에 임명됩니다.
그의 별명은 **“빈민촌의 추기경”**이었으며,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역에도 혼자 발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 제266대 교황 즉위 – 2013년

2013년 3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건강 문제로 사임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1,282년 만의 비유럽권 출신, 첫 남미 출신 교황, 첫 예수회 출신 교황으로 기록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4. 청빈과 개혁의 상징

즉위 직후부터 그는 소형차를 이용하고, 금으로 만든 십자가 대신 철제 십자가를 걸었으며, 바티칸의 고급 관저 대신 일반 사제들이 머무는 산타 마르타의 집에 거주했습니다.
이러한 겸손함과 실천적 리더십은 가톨릭교회 안팎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5. 진보적 메시지와 사회적 행동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 커플 축복 허용, 여성의 역할 확대, 기후변화 대응, 빈부격차 문제 지적, 신자유주의 비판 등 진보적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놓으며, 보수 진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 복음의 실천”**이라며 자신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6. 세계 평화를 위한 여정

  •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중재
  • 미얀마 로힝야 사태에 대한 메시지
  • 이라크 방문 – 역사상 첫 교황의 이라크 방문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단 촉구
  • 팔레스타인 분쟁과 민간인 희생에 대한 경고

그는 언제나 평화의 중재자, 고통받는 자들의 대변인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7. 한반도와의 인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아시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으며, 방북 의사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이는 그가 한반도 평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8. 마지막까지 겸손한 교황

그는 장례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간소하게” 치러지기를 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령과 질병 속에서도 교황직을 내려놓지 않았고, “나는 건강하다. 단지 늙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결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삶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생은 청빈, 겸손, 사랑, 평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 존재였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라."